요즘 조직론을 다룬 글을 읽다 보면 사람이 자주 "AX 시대의 직원"으로 환원된다.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지, 얼마나 AI와 협업할 수 있는지, 대체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지. 효율의 언어로 번역된 사람은 어쩐지 작고 납작해진다. 그런데 사람은 원래 그렇게 생긴 존재가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다른 누구도 똑같이 부릴 수 없는 자기만의 마법이 있다. 지기지우는 바로 그 마법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벗이다.

거문고 소리가 곧 그의 마법이었다

백아(伯牙)라는 거문고의 명인이 있었다. 그가 높은 산을 마음에 두고 줄을 튕기면 나무꾼 종자기(鍾子期)는 "높고 높도다, 태산과 같구나" 했고, 흐르는 물을 떠올리며 연주하면 "넓고 넓도다, 양자강과 같구나" 했다.

흥미로운 건 종자기가 거문고를 칠 줄 몰랐다는 점이다. 그는 기능으로 백아를 평가하지 않았다. 연주 기법, 지판 운지, 호흡의 길이 — 그런 것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가 들은 것은 백아라는 사람 안에 있는 세계였다. 그 세계가 소리로 번역되는 순간을 그는 포착했다. 그것이 백아의 마법이었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었다. 연주 실력을 칭찬해줄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마법을 알아봐주는 유일한 눈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기술은 시장에서 평가받을 수 있지만, 마법은 오직 알아보는 사람 앞에서만 발화된다.

포숙은 아직 피지 않은 마법을 보았다

관중(管仲)이 젊어 가난하던 시절, 포숙아(鮑叔牙)와 함께 장사하며 이익을 더 가져가도 포숙은 그를 욕심쟁이라 하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세 번 도망쳐도 비겁자라 부르지 않았다. 남들 눈에 관중은 그저 이기적이고 소심한 실패한 사내였다. 이력서로 보면 형편없는 경력이었다.

그러나 포숙은 관중 안에 있는, 아직 터지지 않은 마법을 보고 있었다. 훗날 관중은 제나라의 명재상이 되어 이렇게 말한다.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요,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

여기서 "알아준다"는 것은 결과를 보고 칭찬하는 일이 아니다. 드러난 실적을 인정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포숙이 한 일은 아직 세상에 증명되지 않은 마법을 먼저 알아본 것이다. 이력서에도, KPI에도, 평판에도 없는 어떤 것. 그것을 믿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드문 일인지 살아갈수록 실감이 난다.

기능은 측정되고, 마법은 알아봐진다

사람을 기능으로 본다는 건 이런 것이다. "이 사람은 백엔드를 얼마나 잘하나, 문서화 능력은 어떤가, AI 툴 활용도는." 다 필요한 질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들이 한 사람의 전부를 길어내지는 못한다.

한 사람이 코드를 쓸 때 문제를 어떤 각도에서 들여다보는지, 어떤 지점에서 조급해지고 어떤 지점에서 끈질겨지는지, 말끝에 묻어나는 특유의 결, 고집스럽게 붙잡고 있는 미감, 엉뚱한 데서 터지는 감탄 — 이런 것들이 모여 한 사람의 마법을 이룬다. 이건 측정되지 않는다. 그저 가까이서 오래 본 사람에게만 서서히 드러난다.

그래서 조직 안에서 사람이 가장 상처받는 순간은, 실적이 낮게 평가될 때가 아니라 자기 안의 마법이 한 번도 보이지 않은 채로 정리될 때이다. 내가 어떤 색을 가진 사람인지 아무도 몰랐던 채로 지나가버리는 경험. 그 경험이 사람을 가장 외롭게 한다.

마법은 대체되지 않는다

이 관점에서 보면 AX 시대에 가장 중요한 질문이 바뀐다. AI가 내 일을 대체할 것인가가 아니라, AI가 결코 복제할 수 없는 내 마법은 무엇인가이다.

그리고 지기지우의 역할은 그 질문에 내가 스스로 답하기 훨씬 전에, 먼저 답의 윤곽을 봐주는 것이다. "너는 이런 순간에 유독 번뜩이더라", "이 문제 앞에서 네가 멈칫하는 건 네가 소홀해서가 아니라 네가 그걸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지." 이런 말이 오가는 관계 하나만 있어도 사람은 자기를 잃지 않는다. 시장이 아무리 자신을 숫자로 환원하려 해도, 마법을 알아봐준 눈의 기억이 자기를 붙잡아주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의 마법을 보고 있는가

지기지우를 갈망하면서 우리는 자주 방향을 한쪽으로만 설정한다. 나를 알아줄 누군가가 있었으면. 그러나 종자기도 포숙도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한 사람은 나무꾼이었고, 한 사람은 친구의 허물을 덮어주던 평범한 상인이었다. 그들이 한 일은 딱 하나 — 상대의 마법을 놓치지 않고 봐준 것이다.

어쩌면 지기지우는 얻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다. 누군가의 이력서 뒤에 있는 결을 읽어주는 사람, 누군가의 실수 아래 깔린 고유한 감각을 알아봐주는 사람. 그런 눈을 먼저 가진 자리에, 비슷한 결의 사람이 머문다.

그러니 오늘 자문해볼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지금 누구의 마법을 보고 있는가. 가까운 사람, 동료, 배우자, 자녀 — 그 안에서 아직 아무도 이름 붙여주지 않은 어떤 반짝임을 나는 알아보고 있는가. 그 답을 가진 사람이, 결국 누군가의 지기지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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